임시 정부 대통령 탄핵(1925)
1921년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건을 계기로, 임정 내 일부
독립운동가들과 내부 대립,갈등하게 되었다. 신채호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
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고 말했고 임시 국
무총리 이동휘는 "대통령이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바람에 정부 대표로 가 있는
김규식 특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위임통치를 요청하려면 뭐 하러 파리까
지 왔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
다는 성명서를 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
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이니 철회할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25]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24]
다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서 전문이다.
주문
-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시킴. 이승만 탄핵안에 의
- 해 그 위법사실을 조사한 증거를 열거하면 민국 6년
- 12월 22일부로 전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보낸 공문,
- 동 6년 12월 22일부로 국무원 각위 회람으로서 송부
- 된 임시대통령 공문, 동 6년 7월 3일에 발한 구미위원
- 부 통신부 특별통신, 동 7년 1월 28일에 낸 구미위원
- 부 통신 특별호, 동 7년 2월 13일부로 박은식에게 송
- 부한 서신 등과 같다.
-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지를 떠나 5년 동안
- 원양일우에 편재해서 난국수습과 대업진행에 하등
-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무한 사실을 제
- 조 간포해서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심을 분산
- 시킨 것은 물론,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수입을
- 방해하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을 부인하
- 고, 심함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행정과 재부를 방해하
- 고, 임시헌법에 의해 의정원의 선거에 의해 취임한
- 임시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고
- 해서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한성조직 계통 운
- 운'과 같은 것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 부인하는 행위다.
-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
- 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진행을 기하
- 기 어렵다. 국법의 신성을 보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
- 라 순국 제현이 명복할 수 없는 바이고, 또 살아있는
- 충용들이 소망하는 바 아니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
- 다.
대한민국 7년 3월 11일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회
위원장 나창헌
[26]
한편,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직을 맡았던 조소앙은 1925년 3월 임시의정원
의 이승만 대통령 탄핵,면직 조치에 극력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이듬해 1926년
말까지 하와이에 거주했던 이승만에게 임정 내부의 사정을 내보(內報)하며 이
승만의 복권을 시도했었다.[27]
박용만과의 갈등 중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 활동에서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기도 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온 초기부터 하와이 실력자이면서 군사양성에 열중하는 박
용만을 맹렬하게 비난했고, 박용만 반대세력을 규합했다. 이승만은 대한인 국
민회의 운영권 곧 회비관리권을 움켜쥐려고 온갖 공작을 벌였으나 쉽게 실현되
지 않았다. 박용만은 다른 농장으로 군영을 옮겨가면서 군사훈련을 거듭했으나
두 사람의 대립은 그칠 줄 몰랐다.[145]
1910년대 중반 무렵 일제는 밀정을 통해 박용만의 군사훈련 사실을 캐냈다. 주
미 일본 대사관에서는 미 국무장관에게 이를 항의했고 국무장관은 하와이 총독
에게 그 실정을 알아보게 했다. 1918년 박용만이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을 받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했다.[145]
“ |
그는 미국 영토에 조선국민군단을 설립하고 배일활동을 하면서 일 본군함 출운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 려는 짓이다.[145] |
” |
박용만은 온갖 음모에 시달리면서 주도권을 잃어갔다. 이승만은 자금횡령 혐의
로 대한인 국민회 간부들을 고소했고, 국민회 간부들은 법정에서 고통을 받아
야 했다. 서로 벌인 소송사건이 열 차례나 있었다. 국민회와 이승만파(동지회)
가 서로 테러를 가하기도 하고 국민회 대포회의때 총격이 가해지는 일도 벌어
졌다. 이런 분쟁 속에서 마침내 국민회 주도권이 이승만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분쟁이 야기되는 속에서도 독립기부금은 잘 걷혀 1915년 1,523달러에서 해마
다 늘어나 1918년도에는 3,775달러를 기록했다.[145]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출신들과 한인 사업가들이 조국 독립을 바라는 일념에
서 대한인 국민회에 꾸준히 회비를 냈었는데, 하지만 미주 재미 한국인들은 이
승만을 두고 '협잡배'라 매도했고 돈을 너무 밝힌다고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고
한다.[145]
이후에도 이승만과 국민회가 독립자금 문제로 분란을 겪어 끊임없이 의혹을 받
고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족되자 국내외에 걸쳐 많은 독립자금
이 들어왔는데, 1919년 미주의 국민회에서 임시정부에 송금한 내역을 보면 공
식적으로 36,000달러였다고 한다. 다음 해 이승만도 많은 돈을 가지고 상하이
로 왔는데, 1920년도에는 미주에서 200만 달러를 모금했는데, 이는 오늘날 가
치로 보면 2억 달러가 된다.[146]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발족한 뒤, 미주 동포들이 낸 독립자금은 구미위원부에
서 마음대로 전용하고 임시정부로 보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자금 모금을
두고 다시 주도권 분쟁이 야기되기도 하였다.[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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