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도 잔혹하고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런 일본을 욕하는 우리도 이걸보면 별반 다를게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우리의 어두운 과거는 왜곡하면서 미화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넘겨버리는 모습을 볼때마다 참 마음이 무겁다

비단 베트남 전쟁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 없이는 우리의 미래도 결코 밝지 않다고 생각한다

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0/02100300020001115033405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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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에 대한 평가는 1968년 2월12일부터 1969년 4월15일에 이르는 1년2개월 동안 다낭시에 파견된 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이 주월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니콜라스 손에게 보내는 장문의 보고서에 등장하고 있다. 평가대상 부대로는 당시 베트남 쿠앙남성 지역에서 작전을 벌인 한국군 해병 제2여단에 맞춰져 있다.

미군은 크게 △한국 해병 제2여단의 전투력 및 전투태도 △주월미군과 남베트남군대와의 협조 관계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잔혹행위 △암시장 거래 등 전투와 무관한 불법행위 등을 주로 다뤘다.

먼저 한국군의 전투력에 대해 미군은 “베트콩 등 적들에 대한 주요 군사행동을 주도적으로 취하기를 꺼린다”고 분석했다. 1968년 3월18일치 보고는 “한국군은 정기순찰과 매복을 하기 위해 그들의 사령부를 떠나기를 꺼려했고, 베트콩의 매복을 매우 두려워했으며 (베트콩이) 밤에 나타나는 상황에 대응하는 것을 피했다”고 썼다. 같은달 25일치 보고에서는 “쿠앙남성 자문단이 (베트콩에 대한) 수색과 파괴활동을 요청했지만 이를 무시했다”는 언급도 등장한다.


“지난 두달 사이 한국군 정찰대가 마을에서 발생한 조그마한 총격전에 대한 보복으로 포로를 살해한 사건이 최소한 세번 발생했다. 가장 불명예스러운 사건은 1968년 2월12일 퐁니(Pong Nhi)마을에서 일어났다. 그곳에서는 79명(또는 69명)의 여성과 아이들이 죽음을 당했다. 베트남 농민들은 한국군을 매우 두려워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군보다 베트콩이 더 낫다고 얘기했다.”(1968.3.18)

“한국군 부대가 디엔 반(Dien Van)현에 주둔했고 그들은 우리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우리 마을로 들어와서 주민들을 집에서 끌어내고 총을 쏴 사람들을 죽이고 가족들의 몸을 자르는 등 야만적인 행위를 했다. 한국군 부대는 시체를 그대로 두거나 숨기고 그 현장을 떠났다.”(1969.2)

“한국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증오심은 너무나 심각해서 주민들은 베트콩이 설치한 지뢰나 그들이 저지른 테러까지 종종 한국군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베트콩의 정치적 선동활동에 의해 ‘박정희 용병’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얻은 한국군들은, 도저히 가망성은 없지만, 만일 그들이 위대한 전사 또는 인도주의자로 돌변한다 하더라도 주민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는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1969.4.23)

“베트남 관리들과 베트남 민간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반한감정의 깊이와 강렬함 때문에 여러 차례 경고를 보냈다.… 실상 한국군이 동맹군으로서 행동하기보다는 아시아의 점령군과도 같이 행동하는 상황이 계속됐기 때문에 베트남 관리들의 경고는 효과를 볼 가능성이 없었다.”(1969.4.25)

암시장에 물건을 내다팔거나, 물건을 공공연히 훔치는 등의 ‘도덕적 해이’는 보고서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단골메뉴다.

“한국군의 암시장 운영은 디엔 반 지구, 빈 수엉(Vinh Xuan)과 라이 나이(Lai Nghi)마을에서 한창 진행중인 것이 명백하다. 우리는 이 마을들에서 한국군들이 소다수, C레이션, 쌀을 대규모로 팔고 있다는 보고서를 끊임없이 받고 있다. 1969년 3월13일 아침 우리는 한국지프차가 라이 나이마을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뒤 마을을 방문했을 때 베트남 주민들이 마을에 주차돼 있는 한국 군지프에서 맥주와 소다수 상자들을 가지고 오는 것을 목격했다. 지프차를 조사하면서 우리는 뒷좌석이 전부 맥주와 소다수 박스로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1969.3.14)

“한국 해병 제2여단 소속 병사들이 포획한 쌀을 마을 사람들에게 팔았다는 보고서를 받았다. 쌀의 가격이 너무 비싸서 마을 사람들이 사지 않으려 하자 한국군들은 남베트남군과 민병대를 상대로 이 쌀을 팔려 했다. 그들도 거부하자 한국군들은 민병대들이 기지로 돌아가는 못하도록 했다. 같은날 한국군들은 주월미군사령부 기지로 찾아와서 관할 벙커 근처에 수류탄을 투하할 것이라고 위협했으며 이후 장전한 권총을 꺼내서 수류탄을 쏘겠다며 협박했다. 이 사건과 연루된 한국군들은 대부분은 술에 취한 상태였다.”(1969.3.16)


이와 관련해 한국군들이 베트콩들을 상대로 노획한 쌀을 처리하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대목도 있다. 문서에 따르면 1969년 1월 한국 해병 제2여단은 베트콩이 숨겨놓은 225톤의 쌀 은닉처를 발견해 쌀을 부대로 후송했다. 쿠앙남성 성장(省長)은 한국군에 노획한 쌀 일부를 피난민에게 먹이는 데 쓸 수 있도록 요청했다. 한국군은 어디에 쌀이 필요한지를 여단에 보고해야 하며 한국군이 주민들에게 직접 쌀을 배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뒤 제2여단은 피난민들에게 먹일 목적으로 300포대의 쌀을 주민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한국군은 빈 포대 300개가 반환될 때까지 배포를 중단했고, 대신 이 쌀을 암시장에서 베트남 정부의 공식가격보다 아주 낮은 가격으로 팔았다는 것이다.

암시장 운영과 관련해 보고서(1969.1.30)는 “한국군이 가장 성공적으로 얻어낸 성과는 사실상 (암시장 등을 통한) 경제적인 것”이었다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사진/총을 맞은 채 연못 근처에서 발견된 퐁니·퐁넛촌 여성들.이 사진을 찍은 '본'은 “가운데 임신한 여성은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맞은 듯 머리앞이 날아가 있다”고 썼다)




(사진/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의 보고서는 “한국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증오심이 대단히 심각하다”고 진단한다)


(사진/잿더미가 된 퐁니·퐁넛촌 주민.이 상황은 <한겨레21>이 취재한 생존자들의 증언과 일치한다)


(사진/어머니와 함께 흉측한 모습으로 죽은 아이(맨위).미군들이 주검을 수습하고 있다(아래). 작전에 참여했던 장교들은 이곳이 미군 자매부락이었다고 회고했다)


Posted by 고리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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