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밀약이란 박정희 군사정권의 정일권 국무총리와 우노 소스케 자유민주당 의원이 한일정상회담 에서 한일기본조약 체결 과정 중 큰 문제였던 독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합의한 밀약이다

 

독도밀약은 다음 날 박정희에게 재가를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김종필 전 총리의 친형 당시 한일은행 전무인 김종락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족문화연구소가 공개한 미 중앙정보국(CIA)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민주공화당(5·16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군부 세력이 구 자유당 세력과 대한국민당 세력, 기타 정구영 등 학계와 시민사회단체 일부를 흡수하여 창당한 정당 - 새누리당의 전신) 창당과정에서 북한 공산당의 비밀자금이 쓰였다고 폭로되었으며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군사쿠데타를 한 1961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밖에도 일본에 쌀을 수출하는 과정에서 김종필이 재일 한국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았다.

 

 

독도밀약 내용


1.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2.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3.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4.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61년부터 시작된 6차회담 기간에 평화선에 기초한 40해리를 주장하던 5.16 군사반란 이전의 한국정부의 입장에 대비하여 변화가 생겼다.

 

외무부와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대에도 박정희의 대선일정 등을 감안해 '12해리 전관수역' 입장으로 물러섰다.

 

일본은 1963년 6월 7일 어업협력에 따른 청구권은 5억달러 이내로 하되 12해리 전관수역의 합의 또는 평화선 철폐와 어선나포 방지를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7월12일 전관수역을 12마일+α로 하기로 양국간 의견조율이 이뤄졌다

 

1963년 일본측의 요구를 수용한 한일어업협정의 발표를 미룬 정황도 드러났다. 정부는 그 해 7월까지만 해도 ‘12마일 전관수역 방안으로는 영세 어민의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40마일 전관수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일본에 전달했다

이후 평화선이 철폐되고 독도가 공동규제수역으로 설정되고 공해(公海)가 되었다. 성능이 좋은 일본의 어선이 동해의 물고기를 거의 싹쓸이 하다시피 하였다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은 1998년 1월에 일본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 통보되었으며 양국은 이후 새로운 교섭을 통해 한일어업협정을 1998년 9월에 타결시켰다

 

 

 

1974년 한일대륙붕협정


1970년 6월에는 제주도 남쪽 8만km²를 제7광구로 정하고 한국령으로 공식 선포했다.

 

하지만 1972년 당시 정설이었던 자연연장설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유리한 처지에 있었으나 박정희는 공동개발하기로 합의하였다.

 

1972년 일본이 “한일간의 중간선에서 일본 쪽으로 넘어온 부분은 양국이 50%씩 지분을 갖고 공동개발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현재 일본은 공동개발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계속 지연시키고 있다.

 

계속 지연시키면 2028년 대륙붕협정이 만료하는 날 자연연장설 대신 UN의 새 해양법이 적용되어서 일본에 유리하게 된다.

 

한국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74년 한일대륙붕협정이 맺어진다.

 

 

 

독도 밀약 이후
 

군사정권은 독도 수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 고문하여 독도 관련 운동을 금지시켰다.

 

전두환 대통령은 직접 방일해 일본으로부터 40억불 차관 제공을 약속받았다

 

1982년 11월 16일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중앙정보부는 그를 고문하면서 '독도에 대해 더 이상 입을 놀리면 좋지 않다며' 다시는 독도를 우리땅이라고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협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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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는 글을 못쓰도록 만들겠다고 오른손을 부러뜨렸었다.1974년 12월의 일이었다

 

홍 대장의 미망인 박영희씨는 1974년 12월 남편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 간 고문당했고 "'앞으로 독도에 대해 언급하지 마라'고 강요받기도 했다."고 밝혔다.

 

박정희의 독도밀약과 그의 이율배반적 태도의 내막을 알지 못하는 홍 대장은 1969년, 1972년 두 차례에 걸쳐 독도개발계획서를 경상남도에 제출하나 무시당하고, 1976년 다시 제출했을 땐 예산이 없다는 핑계일 뿐인 회신을 받는다

 

80년대 초, 정부는 그가 북한 방송에서 소개되었다는 이유로 홍순칠을 다시 고문하였고 1986년 고문후유증으로 숨졌다

 

민주화가 되면서 2005년 열린우린당 전병헌 의원 등이 특별법을 제정하여 국가유공자로 지정해주었다.

 

또한 홍순칠을 비롯한 독도의용수비대의 다른 유공자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도 있고 지원금도 타게 되었다

 

1997년 7월 당시 김영삼 정권은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기점을 울릉도로 하는 발표를 하고 그 해 10월 잠정공동수역안(잠정조치수역은 독도 중간수역)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여 독도를 중간수역으로 하기로 일본과 합의하였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는 독도를 강제관할권 배제선언을 하였고 EEZ 기점으로 선포하였다. 오늘날 독도영유권 훼손이라고 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공동수역’은 이렇게 탄생했다.

 

1965년 한일어업협정에서도 군사정부에서 중간수역 지위에 해당하는 공동규제수역으로 설정했고 신 한·일 어업협정은 DJ정권에서 최종 타결됐지만 문제의 조항을 수용한 것은 YS정권이었다.

 

김대중 정권에서는 대화퇴 어장 등 독도 영유권과 상관이 없는 지역에 관해 협상했다

 

 

참고자료

 

42년 전 한·일 `독도밀약` 실체는 … 중앙일보, 2007년 3월 19일
 "독도는 무가치한 섬" 한일회담서 폭파 제안 한겨레, 2005년 8월 27일
 김영구, 「한일 어업협정, 그 치명적인 실수」 《한겨레21》, 2006년 5월 3일
 "독도 폭파하자" 발언, 일본이 먼저 꺼내 한국일보 , 2005년 8월 26일
 <한일회담문서 발췌>-어업문제ㆍ평화선 연합뉴스 | 2005년 08월 26일
조약 전문 한일기본조약 전문(일본어)
 Treaty on Basic Relations between Japan and the Republic of Korea 한일기본조약 전문(영어)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한국어)
 
한일회담 관련 공개문서 발췌내용 (연합뉴스)
 
「日帝被害者数103万人は適当に算出」 朝鮮日報 2005/01/21 閲覧"`103만명' 숫자, 자료없어 주먹구구식 산출" 조선일보 (朝鮮日報) 2005.01.21 (朝鮮語).
 
 「한일기본조약」, 《브리태니커 백과》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B%8F%85%EB%8F%84_%EB%B0%80%EC%95%BD

Posted by 고리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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