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의 속셈을 해부한다

2006년 7월3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의 글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
ⓒ 동아일보
건국절

먼저 한국의 수구세력이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내세우는 정치적 배경부터 알아보자.

 

첫째, 이들 세력의 핵심은 친일파, 이승만의 백색독재,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기득권세력이다. 이들은 근 100년 동안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기득권을 갖게 되고, 독재정권에 기생하면서 정치·경제적으로 권력과 부를 세습하게 되었다. 기득권층이 되었으나 이들에게는 친일 반민족, 분단냉전, 친독재 반민주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한국의 주류세력으로서는 역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정통성의 위기를 갖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1948년 8·15를 건국절로 삼으려 하는 것은 친일과 분단이라는 죄상과 부끄러운 상처에서 벗어나려는 몰염치한 꼼수이다. 1948년 8·15를 건국기원으로 삼아서 이승만 정권에 가담한 친일파들을 건국공신으로 추겨세우고, 국가권력과 경제적 부를 독점하면서 이를 자손만대에 세습하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둘째, 1948년 8·15가 건국절이 되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아니게 되고, 친일파들도 남의 나라 일로 치부된다. 일제의 한국 병탄이나 식민통치는 오 늘 우리 국민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식민지 배상, 문화재 반환, 위안부 문제 사죄 등을 요구할 권리가 원천적으로 상실된다.

 

셋째, 대한민국 헌법 제3조의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한다"는 조항 도 무용지물이 되고, 통일을 주장할 헌법적, 역사적 근거를 잃게 된다.

 

넷째, 헌법 전문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이란, 오랜 역사와 전 통은 사라지고 60여 년 밖에 안 되는 신생국가의 위치로 전락하게 된다.

 

이와 같은 역사 죽이기, 역사 속이기의 흑심은 오직 친일 후손들이 선대들의 친일행적을 없애려는, 그리고 독재자 이승만의 망령을 부활시켜 기득권을 지키려는 속셈인 것이다. 친일의 죄과를 사죄하기는커녕 역사를 왜곡하고 독립운동사를 실종시키려는 반민족적인 범죄행위인 것이다.

 

<관보> 제1호에도 임시정부 기원 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요인 신년 축하모임(1921.1.1). 붉은 원내는 이승만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 자료사진
임시정부

오늘의 대한민국은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상하이)에서 수립 선포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신과 법통을 이어받았다. 종으로는 4300년 전 단군의 건국을 계승하고, 횡으로는 세계만방에 자주독립을 선언하면서 '제국'이 아닌 '민국'을 수립하였다.

 

이것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오롯이 담기고 정부의 각종 기록으로도 그대로 명시되었다. 1948년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정·부통령 취임식의 취임사에 이승만은 "대한민국 30년 7월 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라고 명기하였다. 그리고 당시 정부에서 발행한 대한민국 <관보> 제1호는 헌법을 게재하면서 "대한민국 30년"이라 명시하였다.

상해임시정부에서 탄핵되어 쫓겨난 이승만도 역사적 사실은 숨길 수 없어서 취임사와 <관보>에 임정의 기원을 명기했던 것이다. 역사에 무식하게나 왜곡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제헌헌법의 전문을 다시 읽어보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돼 있다.

 

상해임시정부는 '건립'이라 표기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재건'이라 하여, 임시정부의 창업과 대한민국의 법통계승을 분명히 하였다. '건국'이라는 용어를 함부로 쓰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정부를 수립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기원을 계승한다고 헌법 전문에 명시한 것은 그럴 만한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에 나라를 강탈당한 지 9년 만에 겨레의 총의로 항쟁한 3·1운동의 결실이고, 둘째는 세계사적인 시대사조인 민주공화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상해에 모인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조선8도의 대표와 해외 동포들의 대표자 29명을 선출하여 먼저 임시의정원을 구성했다. 독립지사들은 독립협회 당시 구성했던 의회원(議會院)에서 기원하는 의회나 국회 대신 "독립 달성 이전에는 임시의정원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광복이 이루어지면 '국회'로 발전시킨다"는 전제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한 것이다. 용어 하나라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은 지사들이 높은 식견과 역사의식을 찾게 한다.

 

1919년 4월 10일 저녁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11시간 동안 계속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국호와 연호의 제정에 관해 토론을 거듭하였다. 토론 과정에서 대한민국·조선공화국·고려공화국·대한제국 등 이념과 출신성향에 따라 여러 가지 국호안이 제시되었다. 단군 이래 전통적인 국호라는 '조선', 대한제국으로 망했으니 다시 그 이름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대한제국',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고구려의 약칭인 '고려' 등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다수는 마한·진한·변한의 한(韓)은 곧 한민족의 오랜 국호이기도 함으로, 대한을 채택하고, 시대역행적인 '제국'이 아닌 '민국'으로 정하였다. 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는 데는 1911년 청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중국의 신해혁명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임시의정원에서는 국호뿐만 아니라 정치체제에 대해서도 밤을 세워가면서 토론을 거듭하였다. 이씨 황실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의 구심으로 삼자는 복벽주의(復辟主義),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에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체제론 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다수의 의견에 따라 근대적 시대사조에 맞고, 국내에서도 1906년부터 신민회의 애국지사들에 의해 전개된 공화주의 정신에 따라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을 기본으로 하는 '민국'의 근대국가가 수립되었다. 돌이켜 보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망명정부 수립 과정에서 '의회'가 먼저 구성되고, 그 다음에 체제와 정부가 수립된 경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처음이었다.

 

강력한 외적과 싸워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권력구조가 효율적일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 애국지사들은 임시의정원이 정부를 지휘·감독하고 민의를 투입·산출케 하는 민주적인 이원체제를 채택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독립지사들의 한없이 높은 도덕성과 민주주의 정신을 찾게 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21625&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9

Posted by 고리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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